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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H 분의 질문에 답변을 드립니다
정성열 2019-07-03 13:15:09

먼저 감사드립니다. 진지하게 설교 들어주시고, 고민하시고, 신학적으로 고민과 반론을 제기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질문주신 분께 좀 더 명확하게 답변 드리기 위해서, 올려주신 질문을 요지에 따라서 나누어 답하려고 합니다.

 

질문 1. I have some comment about Sunday sermon. 다윗의 평생 습관(하나님께 묻되) 6개의 성경 인용 구절 모두 다윗이 군대에 Conscripted 된 이후 블레셋과 전투 과정과정 Common accident에서 나타난 대화 목사님은 다윗이 목장에서 양치기를 할 때부터 하나님과 평생의 대화습관이라고 설교 성경구절 인용시점에 문제 뿐 아니라 블레셋과의 전쟁 과정에서 군대를 쫓아야 할지를 말아야 할지 묻는 6개의 성경의 단일 혹은 2개의 사건을 평생 하나님과 대화하는 다윗의 기도습관으로 설교는 신학적 오류 Art of covenant of Load brought into temple

 

답변 1.

다윗의 일생에서 기도습관을 재조명하는 일은 기본적으로 예시로 들었던 6개의 성경구절에 국한되지는 않습니다. 우선 제가 6개 구절을 대표적으로 인용한 것은 거기에 사용되었던 단어가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그와 관련된 원어 해석을 첨부하면

la'v(7592, 샤알)

묻다, 구하다, 요구하다, 간청하다

샤알(동사)은 기본 어근이며, '묻다, 구하다, 요구(요청)하다 ask, 구걸하다, 간청하다 beg'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170회 이상 나오며, (거의 대부분), 니팔, 히필형으로 사용되었다........... (중략) 샤알은 남녀들이 하나님께 인도해 주시기를 구하거나 또는 구하지 않는 것과 관련하여, 여호와께 문의한다는 의미로 사용된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이었던 다윗은 여러 차례, "여호와께 물었다"(삼상23:2, 삼상 30:8, 삼하 2:1, 삼하 5:19, 삼하 5:23, 대상14:10, 대상 14:14 ).................. (바이블렉스 9.0 성경주석 발췌)

 

사무엘서 이외에도 그가 저술했던 시편의 여러 시들을 보면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 속에서 그의 묵상과 기도의 흔적들을 풍성하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에 대한 이야기는 뒤에 나누기로 하고, 우선 예로 들었던 6구절과 관련하여 다윗이 하나님께 묻는 기도습관에 관련한 주석들을 몇 가지 소개하고자 합니다.

 

a. “(삼상 23:2,4,9) 다윗이 이렇게 의롭게 행동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인도를 받았기 때문이다(23:2,4,9). 다윗은 자기나 다른 사람의 생각대로 행하지 않고 여호와의 뜻을 묻고 확인하여 실천에 옮겼다. 반면 사울은 정보원의 첩보와 자기의 지혜만을 의지하고, 주어진 상황과 하나님의 뜻을 자기가 원하는 대로 해석한다.” (How to 주석 - 사무엘상 405p)

b. “(삼하 2:1) 아말렉 소년의 왕권 수여를 거부한 다윗은 사건이 잠잠해진 후에 시글락을 떠나 유다 땅으로 돌아가기를 원했다. 먼저 그는 여호와께 모든 것을 물음으로써 하나님과의 관계를 확실히 구축한다.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때를 분별하는 일이다. 모든 일에는 적기가 있기 때문이다. 다윗은 결코 자신의 때를 스스로 분별하여 결정하지 않았다. 매사를 하나님께 여쭈었다.” (엑스포지멘터리 - 사무엘하 48p)

c. 지면상 양이 많아 그대로 옮기기가 어려운 좋은 주석이 한 가지 있는데, 그것은 생명의 말씀사에서 출간된 [거룩하신 여호와 앞에 누가 능히 서리요. 김지찬 지음] 입니다. 제가 사사받았던 신학교의 담당 교수님이시기도 했고요. 구약을 내러티브(이야기) 관점에서 살펴보면서 성경이 하나님께 묻지 않는 사울과, 하나님께 묻기를 즐겨하였던 다윗을 비교하면서, 하나님께서 세워 가시는 왕으로서 다윗의 정당성을 그의 묻는 습관(기도)이 상당부분 기여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무실에 보관 중이니 내방하시면 열람하실 수 있습니다.)

 

다윗이라는 한 사람의 인생에 있어서 성경은 한정된 지면 안에서 여러 차례 하나님께 여쭈었던그의 모습을 강조합니다. 사무엘서가 다윗의 개인적인 신앙 자서전이 아니기 때문에 그가 언제부터 기도를 열심히 했는지에 대한 내용까지는 담고 있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성도의 입장에서 볼 때, 하나님께 묻는 기도의 모습은 지속적인 훈련의 과정을 통해서 그들의 삶에 자리 잡게 되는 것을 이미 경험하고 있습니다. (이미 질문주신 분도 충분히 경험하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다윗이 언제부터인지는 확실치 않더라도, 그의 인생에 있어서 상당부분 오랜 시간에 걸쳐서 하나님과 친밀한 기도의 삶이 이어졌다는 것은 충분히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시편을 들여다보는 것은 의미가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다윗이 지었다고 알려진 시편의 내용들은 모두가 기도입니다. 탄식과 간구, 영광과 찬양 등 상황과 목적의 차이가 있지만,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다윗의 고백입니다. 만약 질문 주신 분께서 여러 시편들이 다윗의 저작임을 인정하신다면 충분히 공감하실거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누구도 각 시편의 저작 시점을 정확히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가 몇 살 때, 언제 기록했는지 지금 상황에서는 누구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의 삶의 내용과 시편의 고백들을 전체적으로 연결해보건데, 그는 누구보다 하나님께 물었고, 고백했고, 그분의 음성을 따랐다는 것이지요. 기도가 다윗의 삶에 충분치 않았다면 우리 손에 시편은 쥐어지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따라서 다윗의 전 일생에 걸쳐서 기도가 지속적으로 행해졌다는 것은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성경해석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다윗은 평생에 위에 언급된 6번만 기도했다는 것으로 해석해야하는데요, 저는 다윗이 6번만 기도했다고 생각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다윗은 자신이 필요할 때만 하나님을 이용하는 기회주의자가 되어버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기회주의자를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왕으로 세우시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질문 2. 언약궤를 성전에 가져오는 과정에서 그것을 수레에 실어서 가져왔다는 것이 왜 다윗의 거만함과(왕이 되었다는) 우쭐한 함을 상징하는지? 그리고 갑자기 미갈에서 멸시를 당하면서 춤을 추는 다윗이 겸손함으로 태도를 바꾸었는지? 다윗의 교만함-겸손함으로 바뀌는 시점과 순간 (언약궤 수레에 실어서 성전에 가져 오는 순간 -바지가 벗겨지며 춤을 추는 순간) 이 전혀 이해가 되지 않음

 

답변 2. 이 부분에 대해서는 주해를 좀 더 자세하게 했으면 좀 더 이해하기 수월하셨을텐데 예전에 비슷한 본문을 자세하게 주해했던 적이 있어서 시간을 충분히 할애하지 않았습니다. 그 점을 양해 바랍니다. 지금 지면을 빌어 자세하게 설명드리면.....

 

다윗은 언약궤를 다윗성으로 가지고 올라오는 2번의 시도를 합니다. 그런데 명백한 차이점이 있습니다.

1번째 시도

a. 언약궤를 수레에 실고 옴 (삼하 6:4)

b. 각종 악기(당시 왕의 행차 때 사용하는 것들)를 사용함 (삼하 6:5)

c. 다윗은 여호와 에서 행차함 (삼하 6:5)

2번째 시도

a. 먼저 제사를 드림 (삼하 6:13)

b. 베 에봇을 입음 (6:14)

c. 궤를 메어옴 (6:15)

 

당시 언약궤는 성전이 아니라(아직 성전이 지어지기 전입니다.) 기럇아르바(바알레유다)라는 곳에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이 언약궤를 블레셋한테 빼앗기고 난후 그곳에 있었기 때문입니다(사무엘상 5-6장을 읽어보시면 나옵니다). 하나님 임재의 상징인 언약궤는 그것을 이동하는 방식이 분명 율법에 규정되어 있습니다. 레위인들이 메어 와야 하는 것이지요(25:14). 다윗의 방식은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나는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이스라엘의 통일왕으로서 등극하는 자리에서 하나님의 언약궤를 다윗성으로 옮겨오는 것은 자신의 왕권 강화를 위한 상징적인 의식이었습니다. 각종 악기를 사용하여 여호와 앞에서 태연히 걸어가는 모습들이 그를 반영합니다.

그런데 2번째 시도는 그의 이런 태도가 완전히 뒤바뀌게 됩니다. 먼저 제사를 통하여 언약궤를 맞이한 정결한 준비를 합니다. 베 에봇은 제사장이 입는 복식입니다. 다윗이 왕의 의복이 아니라 예배자의 옷을 입은 것이지요. 더군다나 하나님이 말씀 그대로 언약궤를 메어옵니다. 마지막으로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기쁨으로 언약궤를 맞이합니다. 오죽했으면 하체가 드러났겠습니까! 이런 전 맥락을 종합적으로 이해하시면 앞선 첫 번째 다윗의 태도와 두 번째의 태도가 정반대였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질문 3. 마지막, 다윗의 예배의 기쁨은 언약궤의 소중함 (Depends on Covenant of Art, Victory of war) 을 알았기 때문, 갑자기 삶의 무게에 예배하지 못한 우리가 자유하고 편안하게 예배해야 한다는 결론으로 도입되며 평안을 주는 예수님 마태복음 말씀으로 설교가 마무리 되는 것이 부자연스러운.

 

답변 3. 다윗이 언약궤의 소중함을 알았기 때문에 예배의 기쁨을 누렸다고 설명 드린 적은 없습니다. 마지막 결론은 다윗이 하나님의 언약궤를 맞이할 때에 왕으로서 맞이하는 것이 아니라, 한 명의 예배자의 모습을 회복 했을 때에 진정으로 기뻐하고 자유할 수 있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미갈의 표현은 다윗과 사뭇 대조됩니다. 여전히 미갈은 왕족으로서 체통을 지켜야 한다고 다윗에게 핀잔을 주었습니다만, 다윗은 이렇게 말합니다. “(삼하6:21) 다윗이 미갈에게 이르되 이는 여호와 앞에서 한 것이니라 그가 네 아버지와 그의 온 집을 버리시고 나를 택하사 나를 여호와의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으셨으니 내가 여호와 앞에서 뛰놀리라즉 다윗은 왕이 아니라 예배자가 되었습니다. 비로소 왕이라는 신분에서 벗어나 예배자로서 자유함을 맛보게 됩니다.

 

그런 점에서 제가 이렇게 적용을 해드렸습니다. 우리의 경직된 예배의 모습을 거론하면서 우리가 진정한 안식을 맛봐야할 주일에도 여전히 다양한 삶의 무게와 고민들로 말미암아, 마치 하나님의 언약궤가 들어오듯,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도 자유하지 못하고 근심하고 걱정하고, 염려하기 때문에 우리의 예배가 예배답지 못한 현실이 안타깝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마태복음과 요한복음의 말씀은 자유함과 쉼에 대한 예시 구절로서 소개해드린 것입니다.

“(11: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언약궤 앞에서 왕으로 섰던 다윗은 처음에는 예배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두 번째에는 진정한 예배자로 거듭났습니다. 왕의 신분에서 자유 했고, 누구보다 하나님 앞에서 기뻐했습니다. 그런 차원에서 우리 모두가 자신의 상황에서 자유하고 하나님 앞에서 기쁨으로 예배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아하실까 싶어서 그렇게 같이 살아내자고 권면 드렸던 것입니다.

 

여기까지가 질문에 대한 저의 답변입니다. 대화로 풀어 가면 간단했을 이야기를 글로써 적어내려가다보니 상당한 시간이 걸렸네요. 그 만큼 진심이 전달되기를 바랍니다. 저는 평상시에 1층 사무실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서로 대화를 통해서도 얼마든지 설교에 대한 피드백과 설명들 이뤄질 수 있습니다. 주저하지 마시고 사무실 문을 두드려주시면 반가운 마음으로 맞이하겠습니다^^ 

형제님? 자매님?이신지 모르겠지만 이렇게 설교에 대해서 진지하게 들어주시고, 고민하시고 이렇게 남겨주심을 다시 한 번 감사 말씀을 드립니다. 예전에 선배 목사님을 통해서 들었던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성도들의 수준이 목사의 수준을 결정한다.”
덕분에 저도 저의 설교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점검해볼 수 있었고 전달의 차원에서 더욱 세심한 배려가 이뤄져야겠다고 생각해보게 됩니다. 건설적인 이야기 언제든지 환영합니다. 부디 이런 과정들을 통하여 질문 주신분의 삶이 더욱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 저도 질문주신 분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 2019.07.02 정성열 목사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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